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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W, 성인
윉터는 넘겨받은 명령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어. 애초에 싫은 마음은 없었지. 제국의 일원으로서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으니까. 그저 사생아란 이유로 미움받아 저와 함께 척박한 북부에서 살아가게 된 칽타리나 황녀에 대한 안쓰러움이 조금 들었을 뿐이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칽이나가 웃으며 말했어.

"칽이나라고 불러줘요."

또, 그 나직한 저음이었어.
January 1, 2026 at 2:36 PM
"무슨 내용인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결혼하고 나면 북부 밖으로 한 발짝도 내보내지 말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상을 가득 쓴 윉터의 물음에 칽이나는 설핏 웃었어.

"걱정하시는 거예요?"

거칠게 내려진 종이를 제 쪽으로 당겨온 칽이나는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만년필을 들어 서명했어. 잘 됐는지 확인한 칽이나는 다시 그 종이를 윉터에게 내밀며 말했어.

"어떤 내용이든 좋아요. 다 감당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서명해 줄래요?"

그 말을 하는 눈빛엔 확신이 담겨있었어. 아, 그 순간 윉터는 직감했지. 저 눈빛을 이길 순 없겠다.
January 1, 2026 at 2:36 PM
글자를 따라 움직이는 시선에 표정이 조금씩 굳더니 마지막엔 분노가 담겼어. 식을 올리지 않는 거야 서로 제국에게 미운털 박혔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명령이 있을 때까지 칽타리나 황녀를 북부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건, 황녀를 북부에 가둬두라는 거잖아. 이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지.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이렇게까지 박대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어. 종이를 내려놓은 윉터는 황녀의 얼굴을 살폈어. 작게 미소 띤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 분명 이 내용을 알고 있을 텐데도 얌전히 이걸 가져온 이유가 뭘까.
January 1, 2026 at 2:36 PM
"갑자기 찾아와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방문하고 싶진 않았는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라서."

이해해 줄래요? 하는 나직한 저음이 꼭 가슴속에서 울리는 것만 같아서 윉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책상 위 혼인 명령서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어. 자신이 외모에 약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저를 지긋이 바라보는 칽타리나 황녀와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웠지.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한, 말로 하기 어려운 느낌이 자꾸만 들었어.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고 싶어 혼인 명령서를 집어 들어 살폈지.
January 1, 2026 at 2:36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