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블루 아카이브’에서 기호화된 소아성애의 응축된 조형과 소비를 발견하며 이를 중심으로 반응/상호작용함. 누군가는 같은 작품으로부터 기독교적 구원론에 기반한 아가페적 가치의 우상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축으로 비평함. 두 요소 모두 제작자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러나 거기에 종속되지도 않는다(작품이란 결국 독자-시청자를 통해 성립하기에).
한쪽 차원에서의 해상도를 올린다고 명확해질 일일까? 공리적으로 명확하게 분류를 합의한다고 문제의식이 선명해질까? 나는 둘 다에 부정적이다.
이것이 ”XX를 묘사하는 이상 그건 XX이다“ 를 주축으로 정의역의 해상도를 다투는 것이 대단히 불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고, 따라서 시발점이 된 주론과 이에대한 많은 반론의 흐름에 대해 대체로 시큰둥함. 아무리 정밀한 경계선을 문장으로 만들어도 문제를 포착할 수 없을 것.
페티쉬를 가진 주체이자 동시에 특정 페티쉬가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에 비판의식을 가진 당사자로써는, 문제성을 대상물의 내재적 속성으로만 포착하려는 시도에 함몰되는 것은 경계하고자 함.
아 너무 이해갑니다ㅠㅠㅋㅋ...자유로워지겠다고 가상머신 구축했으면서 갑자기 현실에서 안 벗어나려는 제약 주렁주렁 달기 시작하면 대체 액셀은 언제 밟고 목적지엔 언제 가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피차 판떼기들에 과몰입하기 시작하면 오타쿠유니버스엔 못 할 짓거리들 뿐인데..식사처럼 이미 쩔없으로 합의완료된 폭력 아니었어? 하는 생각이 자꾸 스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