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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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point.bsky.social
박작가
@antipoint.bsky.social
시골 마당, 검은 개와 흰 개.
아이고 선생님 저희 동네는 산쪽이라 동네전체가 지금 고립됐어요 ㅎㅎ 어제 눈에 이미 나무들이 뿌러져서 길을 막아서 제설차도 못 오고 눈은 거의 허벅지까지 쌓였고.. 저희 마당 나무들도 눈 무게 못이겨 계속 뿌러지고 있네요; 좀 무섭.. ㅎㅎ
November 28, 2024 at 12:44 AM
엄마의 뼈는 그렇게 우주의 먼지가 되어
내 곁, 내 가장 가까운 곳으로,
시간으로 돌아오겠지.

그리움은
차차 더 익숙해질 것이다.
October 31, 2024 at 8:41 PM
작년 가을부터,
나한테 엄마는 ‘항상 내 곁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다.
오늘 다시 만날 엄마의 몸은 어디에 있는 무얼까 한참 생각했다.

내가 ‘이것봐! 맛있겠지!’하며 차려준 온갖 음식들이 조금씩은 스며들어 있을 엄마의 뼈.
등밀어주면서 ‘여기 이 뼈가 너무 튀어나왔는데..’하며 걱정하던 그 뼈.
고관절 부러진 후 온갖 잔소리로 쫓아다니며 재활에 성공해 멀쩡히 다시 붙여놓은 그 뼈.
나와 엄마의 시간이 오롯이 담긴 그 뼈를,
이제 내가 아는 가장 멀고 광활한 곳으로 보낸다.
October 31, 2024 at 8:41 PM
이번에는 엄마 1주기가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서 은근히 마음이 쓰였다.
의료대란 때문에 뭔가 많이 늦어지나보다, 비상상황이라 한도끝도 없이 늦어지면 어쩌지, 마무리는 해야 하는데..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연락이 왔고
당연한 일이지만 20여년 전 아빠 때와는 많이 다른 시스템을 갖춘 것 같다.
의대에서 화장장까지 전적으로 책임져주어서 우리는 엄마의 영정사진만 가지고 곧장 벽제로 가면 된다고 한다.
October 31, 2024 at 8:40 PM
아빠가 떠났던 20세기 말에는 시신기증이 흔치 않았던 때라서 그랬는지
유골을 돌려받는 과정이 지금과는 달랐다.

그 학기에 교육완료된 기증자들의 유가족들을 한날 한자리에 모이게 했고,
해당 실습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검은 정장을 입고 그 자리에 함께 하며 예를 갖췄다.
엄숙하게 유가족들에게 인사하는 내 또래의 의대생들을 보며 유가족이던 나는 약간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적어도, 저들이 내 아빠의 몸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October 31, 2024 at 8:38 PM
지난 1년 간,
괜찮다고, 걱정말고 맘편하게 떠나도 된다고
엄마에게 했던 호언장담을 지키느라
내가 참 애 많이 썼다.

오늘, 오래 기다리던 엄마의 유골을 돌려받아
뒤늦은 화장을 하고
우리는 동해 바다로 달려가기로 했다.

엄마가 종종 “나는 탁 트인 푸른 바다, 망망대해에 뿌려졌으면 좋겠어!” 했으니까,
마지막까지 엄마가 원하던대로,
내일 아침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고요한 아침 바다에 뿌릴 것이다.
October 31, 2024 at 8:37 PM
엄마가 마지막으로 듣는 말이 무엇일지 몰라서,
한마디라도 더 전하고 싶어서,
엄마 귀에 대고 끊임없이 이렇게 속삭였다.

마지막 숨을 거둔 엄마의 손은 순식간에 창백해졌지만 온기는 좀 더 오래 남아있었다.
엄마의 온기였는지 내 온기였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함께 엄마의 마지막을 지켜주던 의료진이 엄마가 떠나셨다고 알려줬고
나는 그제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아.. 이제 여기는, 엄마가 없는 세상이구나.
나는, 처음으로, 엄마 없는 세상을 시작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October 31, 2024 at 8:36 PM